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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상 선생 특강 : 원극학 이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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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반 학과 - 교사반에서 하신 장지상 선생님 특강


선배 여러분, 동학들 오늘 우리는 정식으로 교사반(敎師斑) 학과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틀간의 공부를 통하여 추상적으로 원극학(元極學)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을 배웠으며, 전수원반과 면수반을 거치면서 혼돈초개법(混沌初開法)과 원극(元極)이 가르쳐 주는 우주에 대한 기원학설을 학습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통문화입니다.
어느 사물을 막론하고 모두 끊임없는 운동과 변화를 하고 있으며, 또한 시간과 공간 중에서 운동하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만약 시간과 공간 중에서 운변(運變)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전통문화를 연구하고, 인류의 비밀을 탐구하며, 시대와 함께 나아가는 것은 우리 염황(炎黃) 후대의 직책이며 임무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역사 시기에 이 전통문화를 연구, 함양하기 위해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연화산에 들어와 함께 배우고 함께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나의 수련이 낮고 아는 것이 적으나 여러분이 고무 격려하여 힘을 북 돋우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원극(元極)에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내가 복이 있어 일찍이 전통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뜻이 깊으며, 비밀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되어 끊임없이 비밀을 풀어 공개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도리(道理)를 해득하는 것은 끊임없이 비밀을 열어 놓는 중요한 도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리를 모르게 되면 그냥 한 단계에 머물게 됩니다.
어떤 사물이건 간에 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 그것을 해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왜 그런가 하는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공(功)을 배움에도 그렇고, 이론을 연구함에도 그렇고, 시대와 동보공진(同步共進)함에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도리(道理)를 모르고 천지운변(天地運變)의 도리(道理)를 모르고 사람의 도리(道理)를 모른다면 그저 아주 국부적인 범위에만 빠질 뿐입니다.
때문에 옛날에는 연공 함에 있어서 한 마디 말이 있었는데 “공(功)을 전할 때는 법(法)을 전하지 않고 법(法)을 전한다 해도 도리(道理)를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도리(道理)를 깨닫게 되면 무한한 지혜(智慧)가 생기며, 천지가 한 덩어리로 융합되고, 돌비맹진(突飛猛進) 하게 됩니다.
역대 이래로 공(功)을 전할 때면 유형유상(有形有象)인 선생이 자기의 후배가 자기를 앞지를까봐 무형무상(無形無象)의 도리(道理)를 전하지 않았으며, 계율을 정하여 전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전통문화의 발전은 아주 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공부와 연공, 직접 겪은 경력도 역시 이러하였습니다.
만약 정도(正道)를 탐구함에 있어서 그 중의 도리(道理)를 모른다면 봉사가 등불을 켜는 것과 같습니다.
잠시 공력이 크더라도 일시적이고 국부적이며 전면적으로 발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교사도 좋고 전수원도 좋고 중점으로 자기의 공력(功力) 방면에서 노력하되, 중요하게는 도리(道理)를 알며, 시시각각으로 일상생활 중에서 스스로 부단히 운변(運變)하며, 지혜(智慧)를 형통(亨通)해야 합니다.
우리는 면수반에서 원극도(元極道), 정공, 동공 등을 배웠습니다.
전수원반에서도 이론을 배웠습니다.
교사반은 전수원반하고 또 다릅니다.
교사(敎師)는 선생다워야 하며 형상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문지식과 응당히 있어야 할 지혜(智慧)가 있어야 하며, 능히 학생을 인도하고 지도하여 과학적으로 정진하도록 해야 하며, 바른 길을 걷게 해야 합니다.
무엇이 바른 길입니까?
천지의 운변(運變), 인생의 진정한 삶을 명백히 하는 것이 곧 바른 길입니다.
원극(元極)은 천지의 기원, 사람의 생장, 만물의 발생으로부터 전체의 서막(序幕)을 열어놓았습니다.
원극학(元極學)은 인류의 전통문화로서의 이론체계가 있습니다.
원극학(元極學)은 도교(道敎)의 성명쌍수를 기초로 하여, 불교(佛敎)의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방법으로 하며, 유가(儒家)의 수심양덕(陽德修心)을 흡수 하였습니다.
동시에 서양문화의 정수와 의학, 사회상의 정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원극학(元極學) 역시 어느 한 단계에 있어서의 문화이므로, 반드시 현재의 시대와 동보공진(同步共進) 해야 만이 발전을 촉진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미 개막식에서 말하였습니다.
“공리(功利)는 같이 배우고, 공덕(功德)은 스스로 닦고, 공력(功力)은 내가 책임진다”
공력(功力)은 공리(功利)의 증가에 따라 증가됩니다.
공리(功利)가 깊으면 공력(功力)도 높습니다.
만약 단편적으로 공력(功力)만 추구하면서 어떻게 공력을 배우고 공력을 보양할 것인가를 모른다면 곧 점차적으로 공력이 소실됩니다.
그러므로 교사반(敎師班)에서는 구체적으로 공리(功利)를 가리키며 본성(本性)을 제고(提高)시키고 지혜(智慧)가 열리도록 합니다.
마음과 몸이 조화되고 통일되면 공력(功力)은 자연히 상승하게 됩니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의 공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려면 우선 그가 도리(道理)를 학습함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도리(道理)를 알아야만 덕을 쌓을 수 있고, 덕을 쌓아야만 공(功)을 기를 수 있습니다.
도리(道理)를 알게 되면 내심상에서 흉금이 넓을 뿐만 아니라 면모상에서도 새로운 승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옛날부터 일정한 수양과 수련을 거친 사람은 마음과 면모가 일치합니다.
이와 같이 면모는 심리변화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가히 자기의 경력을 회고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과 몸이 서로 조화되고, 사람과 천지가 서로 화해야 하는 도리(道理)를 알게 되면 곧 공력(功力)이 늘지 않으려 해도 늘게 되며 법을 구하지 않으려 해도 만법(萬法)이 서로 통하게 됩니다.
“진짜로 전하려고 하면 한 장의 종이로도 되고, 가짜로 전하려고 하면 만권(萬卷)의 책으로도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극(元極)에는 독특한 이론체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화(和)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나만 단독으로 존재하려 해서는 안되며, 여러 학파에 융합되어 화(和)해야 합니다.
반드시 정확하게 화(和)를 대해야 합니다.
원극(元極)이 최고로 높은 것이 아니며, 오직 지식의 바닷속에서 하나의 작은 부분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함께 인류 전통문화의 정수를 계승하고, 시대에 결합시키며, 과학적 방법으로써 결합시켜야 합니다.
우리 학습반은 어느 반이나 과학연구인원이 있으며, 현장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무한대학 연구인원이 현장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의 발전은 반드시 현대방법과 결합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학습을 통하여, 마음과 몸이 건강해졌으며, 다른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었으며, 자연과 사회와 동보공진(同步共進)하게 되었으며, 당연히 일으켜야 할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인생의 도로(道路)상에서 뒤를 돌이켜볼 때, 자기는 허무하게 인생을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혼돈(混沌)이 초개(初開)되지 못한 것입니다.
학습반에서는 도리(道理)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게 됩니다.
도리를 알게 되면 모든 일이 스스로 풀립니다.
어저께 우리는 “혼돈초개도위선(混沌初開道爲先)”을 배웠습니다.
도(道)는 곧 원(元)이며, 원(元)은 곧 도(道)입니다.
도(道)는 우선 도리(道理)를 논(論)하며, 그 다음 도로(道路)를 옳게 선택하고, 도덕(道德)을 기르며, 도법(道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것은 몸을 수련하고 가정을 꾸미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방면에서 모두 그의 실제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인류를 위해 공헌할 수 있습니다.
모두 도리(道理), 도로(道路), 도덕(道德), 도법(道法), 도과(道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선 도리(道理)를 알아야 합니다.

도리(道理)는 자연적인 움직임과 변함입니다.
원극(元極)에서는 자연에 순응할 것을 제창합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입니다.
삼원의 운변(運變)은 자생(自生), 자화(自和), 자반(自返), 호생(互生), 호화(互化), 호반(互返)하는 중에서 가벼운 것이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것이 내려와 땅이 되었으며, 가벼운 것이 올라가는 것은 무형무상(無形無象)인 선천삼원(先天三元)이며, 무거운 것이 내려간 것은 유형유상(有形有象)한 후천삼원(後天三元)입니다.
하늘은 양(陽)이고 땅은 음(陰)입니다.
가벼운 것이 올라가는 것은 본성이고 무거운 것이 올라가는 것은 말성입니다.
삼원의 운환은 만사만물이 끊임없이 운변(運變)함을 게시하였으며 순환규율은 생화반(生化返)이고 생화반은 시간과 공간이 과정이 있어야 하며 어떠한 사물이거나 막론하고 모두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연공도 마찬가지 입니다.
연공만 하면 한꺼번에 하늘에 올라가고 무한한 지혜(智慧)를 얻고 특이공능이 있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일정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이 도리(道理)를 알아야만 번뇌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몰라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의 변화는 또한 순행(順行)과 우심(寓心)의 구별이 있습니다.
‘음순양역장생로(陰順陽逆長生路)’로써, 가벼운 것은 역으로 올라가고 무거운 것은 순으로 내려갑니다.
그럼 사람은 어떠한가요? 역시 음순양역(陰順陽逆, 任脈-陰順, 督脈-陽逆) 입니다.
천지의 변화규율은 누구도 위반할 수 없습니다.
이 자연의 규율은 천지운화 규율로 하여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나타났습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은 시간과 공간인 것입니다.
춘하(春夏)는 양이고, 추동(秋冬)은 음입니다.
우리는 봄과 가을에 어떻게 스스로 보양해야 함을 알고 있으며, 여름과 겨울에 어떻게 생존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여름에는 얇은 옷을 입고,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입습니다.
이 규율은 누구나 위반할 수 없습니다.
“음순양역장생로 전도귀원반태전(陰順陽逆長生路 顚倒歸元返胎全)” 입니다.
이것은 자연운변 법칙과 사회발전 규율입니다.
만약 이것을 모르면 우심(寓心)할 수 있습니다.
우심(寓心)은 어느 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순심(順心)보다 더 클 수 있습니다.
우심(寓心)은 아주 나쁩니다.
천지의 본성은 대공(大公)하며, 자비(慈悲)한 것입니다.
그것은 만물을 다 싣고, 만물을 다 부여합니다.
천지의 본성으로 인하여 하늘이 맑고, 땅이 편안하며, 바람이 잔잔하고, 비가 차분하며, 햇빛이 고루 비칩니다.
햇빛은 누가 가난하다 하여 적게 비추는 것이 아니고, 부유하다 하여 더 비쳐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평합니다.
천지의 말성은 잔폭 합니다.
제대로 운행하던 천지는 말성으로 인하여 한꺼번에 소멸됩니다.
이 때에는 우심(寓心)이 순심(順心)을 초과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잠깐 동안입니다.
어느 광풍이 온종일 불 때가 있습니까? 산이 붕괴되고 땅이 꺼지는 것도 역시 잠깐 동안입니다.
최후로는 본성에 돌아오며, 하늘이 맑고, 땅이 편안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규율입니다.
자연의 운변(運變)중에서 이 사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친(親)하고 화(和)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사람마다 모두가 한 몸이고, 만물은 모두 한 뿌리입니다.
응당 자아양선(自我養善)해야 하며 만물과 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일시적 욕망에 도달하기 위하여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며, 남들보다도 일정한 지위에 빨리 올라갑니다.
실제적으로 이것은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규율(規律)을 모르기 때문이며, 이것이 회멸(灰滅)의 시작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 사람마다 말성이 있으며, 흔히 저만 잘난체하고 우쭐거리며 지기를 싫어합니다.
저만 잘난체하고 우쭐거리는 사람은 크게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사람마다 강도입니다.
눈으로는 좋은 것만을 보려 하고, 좋은 것을 보면 소유하려 합니다.
좋은 옷을 보면 좋은 옷을 입으려 하고 좋은 집을 보면 좋은 집에 살려고 합니다.
즉 도적 마음이 생깁니다.
양덕표준을 말할 때 <나쁜 행위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쁜 마음도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일에서나 마음이 움직이면 이것이 발전하여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만약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자연과 사회의 순리적인 규율(順規律), 어리석은 규율(寓規律)을 알았다면 곧 친하고 화하는 것이지 절대 저만 잘난체하고 우쭐거리지 않을 것이고 도적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만 잘난체하면서 우쭐거리고 지기 싫어하는 것과 도적 마음은 번뇌를 가져오게 되며, 희, 노, 비, 사, 유, 공, 경 7정 6욕을 자아냅니다.
최후로는 지위도 얻게 되고, 돈도 벌었으나 어떻게 돈을 쓰고 걷어 들일 것인지를 몰라 결국에는 망합니다.
“사업을 이루는 것도 어렵지만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운변규율을 명백히 모르며 고집스럽게 돈을 벌 궁리만 하고, 법률에 따라 행동하고 얻으려 하지 않고, 교묘하게 얻으려 합니다.
그 결과 비록 얻기는 했지만 반부패(反腐敗) 운동이 벌어지니 한꺼번에 모든 것이 없어졌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돈과 지위를 얻었지만 며칠 향유하지 못하고 불시에 모든 것이 없어졌습니다.
만약 당초에 알았더라면 왜 사회 운변규율에 따라 처신하지 않았겠습니까?
얻은 것은 아끼고 보호해야 합니다.
사회규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원극(元極)의 도리(道理)를 강의할 때, 사회 자연의 운변규율에 대해 말했습니다.
연공자 앞에 놓인 문제는 어떤 목적으로 연공하며, 어떻게 운용하며, 어떻게 발전시키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기의 병만 고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병도 고치는가, 인류사회에 공헌하는가, 아니면 상반되는 길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공력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소실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공력이 자연적으로 상승되고, 자기의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병도 고치게 되는가 하면 과학연구에도 큰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점차적으로 공력이 없어졌습니다.
대공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대공을 하기만 하면 연단 아래에서 대공 받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장선생이 공을 거두어 가지 않았는가”라고 의심합니다.
나는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생기느냐 또는 없어지느냐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자연과 사회의 도덕규율에 순행(順行)한다면 공이 자라나는 것이고, 위반한다면 소멸되고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리(道理)는 자연계에 순행(順行)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도리(道理)입니다.
이 도리는 순(順)과 우(寓)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놓고 말하면 근본(本)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닦고 가정을 이루고 처신함에 있어서 우리는 도리(道理)를 알고, 도로(道路)를 선택해야 합니다.
도리(道理)를 알아야만 도로(道路)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도로(道路)는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한 갈래는 장구한 것이고, 다른 한 갈래는 짧은 것입니다.
장구하냐 아니면 짧으냐 하는 것은 자신한테 달렸습니다.
우리는 다시 머리들 돌려 자연변화 규율을 보기로 합시다.
가벼운 것이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거운 것이 내려와 땅이 되었으며,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여야만 하늘을 낳고 땅을 낳을 수 있습니다.
천지가 영원히 만들어짐은 그가 부단히 쉼 없이 운동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운변(運變)하여 음양을 집결할 수 있고, 양중음(陽中陰)과 음중양(陰中陽)이 출현할 수 있습니다.
양중양(陽中陽)은 해(日)고 음중음(陰中陰)은 달(月)입니다.
일월의 밝음으로 인하여 우주가 광명하고, 음양이 분명할 수 있습니다.
우심(寓心)한 도로(道路)는 짧은 것이며, 순심(順心)한 도로(道路)는 장구(長久)한 것입니다.
사회와 인류에게 유리한 도로(道路)는 장구(長久)한 도로(道路)입니다.
사람은 말성(末性)을 제거해야만 장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짧고 잠시적입니다.
사람의 질병은 자연계의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 음식의 부조절(不調節), 7정6욕(七情六慾)에서부터 산생 됩니다.
이것은 추상적입니다.
사람의 간사하고, 교활하고, 매끄럽고, 게으르고, 탐하는 것을 제거한다면 곧 번뇌를 제거하고 마음과 몸이 서로 합할 수 있고 사람이 기(氣)와 혈이 거침없이 흐르고, 오장육부(五臟六腑)가 평형 되고,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으며, 음양이 서로 합할 수 있습니다.
“만족을 느끼는 자는 늘 쾌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탐내는 마음이 끝 없고, 늘 만족하지 않는다면 곧 번뇌가 끝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여 소극적이고, 진보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결과가 좋으려면 일을 잘해야 합니다.
발명, 창조를 하려면 고심하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발명, 창조도 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공헌을 하지 않고서도 향수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원극(元極)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지가 쇠퇴하여 진보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쉼 없이 운동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곧 당신이 선택한 도로(道路)가 어떠한가를 보아야 합니다.
바른 길인가 굽은 길인가? 장구한 길인가 잠시적이고 짧은 길인가? 어느 길로 가는가 하는 것은 자기한테 달렸습니다.
사람의 발전도 역시 자기한테 달렸습니다.
도교에서는 “하필 몸 밖에서 경전(經典)을 찾을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당신이 천지와 동보(同步)로 되려면 곧 자기의 본심(本心)을 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밝지 않고 몸이 바르지 않고서도 바른 길을 겉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바른 길은 정기(正氣)이고 굽은 길은 사기(邪氣) 입니다.
원극(元極)은 “병이 생기는 원인은 자신에게 달렸다”라고 게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원극공법(元極功法)을 배우게 되면 “병을 고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병이 고쳐지며, 몸이 강하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강해진다”.
천지는 대공무사(大公无私)하며 자비(慈悲)한 것이다.
해와 달이 광명한 것은 그가 무사(无私)하기 때문입니다.
대해(大海)가 모든 배(船)를 용납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짧고 잠시적인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장구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다음으로는 도법(道法)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도법(道法)은 법칙(法則), 방법(方法), 사람 됨됨이에 있어서의 준칙(準則)입니다.
옛날에는 계(戒)라고 하였습니다.
석자(三尺) 깊이의 물이 얼음으로 된 것은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월의 광명은 쉼 없는 운동 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원극도(元極圖)의 S선은 왜 직선이 아닙니까? S선이라야 쉼 없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직선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여야만 음과 양의 대립 통일이 산생 됩니다.
음중양(陰中陽), 양중음(陽中陰)은 전체적인 법칙입니다.
사물내부에는 서로 상반되는 물건이 있습니다.
외부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원수 중에는 내가 있고 내 안에는 원수가 있습니다.
어느 사물이거나 사업 터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원극(元極)은 양중음(陽中陰), 음중양(陰中陽)을 게시하였습니다.
자기가 진보하려면 도로(道路)를 선택한 후에도 구체적인 정황 하에서 많은 애로에 부딪치게 됩니다.
애로 속에서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 함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연공 함에 있어서, 연공은 조금 해놓고 백병을 고치고 하늘에 오르려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한꺼번에 부자가 되려고 해도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만약 하나의 사업 터를 다스리려면 사업에 불리한 요소를 고려하지 않으면 잘 관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도리(道理)를 알았다면 곧 근원(根源)을 찾고, 조치를 취해야 하며 양중음(陽中陰)을 음으로 운화시키고 음중양(陰中陽)을 양으로 운화시켜야 합니다.
즉 진음진양(眞陰眞陽)을 만들어 황극에 도달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이 운변(運變)과 법칙(法則)을 모른다면 안됩니다.
연공 중에서는 도(道)가 한 자(尺) 자라면 말(末)이 한 장(丈) 자라고 말이 한 장 자라면 도는 열 장 자랍니다.
법칙대로 운변(運變)하지 않으면 상반되는 방향으로 변합니다.
양중음(陽中陰)이 음(陰)으로 운변(運變)하는 것은 순음이고, 음중양(陰中陽)이 양(陽)으로 운변(運變)하는 것은 순양입니다.
즉 진음진양(眞陰眞陽)으로 하여 황극을 이룹니다.
순음순양으로 하여 일월의 광명이 형성됩니다.
즉 양중양(陽中陽)과 음중음(陰中陰)입니다.
우리가 배우게 되는 제2부 공법이 즉 이것입니다.
천지만물 중에서 왜 어떤 사람은 장수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었는가? 또한 왜 성공한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중도에서 그만두기 때문입니다.
즉, 만족하여 더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발명하고 창조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연공이 높은 경계에 오른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병을 고치는 것은 간단하지만 무한한 지혜(智慧)를 얻으려면 아주 멀고 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은 아닙니다.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풍부한 인생의 과실은 따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상적인 인생도로(人生道路)를 걷고 자연법칙(自然法則)과 사회법칙(社會法則)에 따라 행동한다면 모든 어려움은 전진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어려움이므로 어려움을 정확히 대하고, 연공 중에서 말성을 부단히 없앤다면 곧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법에는 규정된 법이 없습니다(法无定法).
법은 사회규율과 서로 대응하고 서로 화합 합니다.
원극(元極)의 법은 무위(无爲)입니다.
무위(无爲)로부터 무불위(无不爲)로 발전합니다.
무위(无爲)는 하나의 법을 제창하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느 학습반을 물론하고 모두 한 사람처럼 친합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그토록 화목하게 친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독일이거나 미국, 한국에서 왔거나를 막론하며, 대흥, 안령, 해남도에서 왔거나를 막론하고 각기 다른 연령, 경력을 막론하고 모두 친화합니다.
이것은 원극본신의 운동 법칙입니다.
즉 무위(无爲)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사람과 천지중에서 사람은 스스로 존중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즉 사념(邪念)을 없애고 말성을 없앴기 때문입니다.
어느 반에서나 규율을 선포한 일도 없고, 벌금을 부과한 일도 없지만 스스로 친화하며, 도적질하는 자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위의 법(无爲之法)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을 알았다면 곧 도리(道理)를 알고, 도로(道路)를 선택하고, 반드시 이 법칙대로 준수해야 합니다.
이 법칙은 쉼 없이 운화하는 법칙이기에 마음을 변치 말고, 꾸준히 견지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유위(有爲)로부터 무위(无爲)에 도달해야 합니다.
욕념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즉 7정 6욕은 누구한테나 다 있습니다.
스님도 욕념이 있습니다.
모두 겉으로는 스님 옷을 입었지만 마음은 가짜가 많습니다.
서로 물고 뜯기를 하는 등 하는 행위가 기가 막히기도 합니다.
바보라야 욕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념이 생길 때 어떻게 운행을 잘하는가 하는 것은 법칙입니다.
“상무시기규(常无視其竅)”해야 합니다.
규(竅)는 자기 몸의 규입니다.
시기규(視其竅)는 유형인 자기 몸 속을 보는 것입니다.
즉, 규(竅)에 뜻을 두고 지키는(意守) 것입니다.
“상무시기묘(常无視其妙)” 여기에서 시(視)는 보는 것이고 묘(妙)는 자연과 사회발전의 운변규율(運變規律)입니다.
즉, 늘 자연과 사회의 발전규율을 보면서, 규율을 위반하면 어떻고, 성공한 것은 무엇이고, 실패한 것은 무엇이라는 것 등을 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무(常无)는 자연사회의 변화이고, 시(視)는 보는 것이며, 묘(妙)는 결과입니다.

도리(道理), 도로(道路), 도법(道法)을 명백히 한 후에도 도덕(道德)을 닦아야 합니다.
덕(德)에는 천덕(天德), 지덕(地德), 인덕(人德)이 있습니다.
원극(元極)의 덕(德)은 사람마다 한 몸이고, 자아양선(自我楊善)하며, 만물을 다 싣고, 만물을 다 부여합니다.
해와 달의 빛은 만물을 골고루 비칩니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흉금, 일 처리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들이 지혜(智慧)가 없고 인류에게 공헌을 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인류에게 봉사하였기에 비로소 지혜(智慧)와 에너지가 있게 되었으며, 본성을 불러 일으켜 자기의 목적에 도달하였습니다.
우리는 원극공(元極功) 학습에서 심(心), 덕(德), 공(功)을 배웠습니다.
여기에 대해 더 중복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한 글자를 더 보태겠는데 그것은 심(心), 덕(德), 공(功) 외에 양(量)입니다.
양(量)이 매우 크면 지혜(智慧)가 무척이나 크고, 공이 매우 크고, 복이 매우 많고, 수명이 무척이나 길게 됩니다.
만일 양(量)이 없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잘난 체 위세 부리면서 지기를 싫어하며, 교묘한 수단으로 빼앗으려 합니다.
양(量)이 없으면 각종의 번뇌가 다 생깁니다.
대해가 무수한 배를 용납하려면 양(量)이 있어야 합니다.
각지의 원극 동학도들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지는데 내 공력이 높거니, 네 공력이 낮거니 쟁론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이 나한테 고소하곤 합니다.
나는 “시비를 가려 달라고 고소하러 오는 사람이 곧 시비를 일으킨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누가 옳은지, 누가 나쁜지를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고소하러 온 사람 본인은 도량이 크지 못하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의 학술단체이지 시비를 가리고 연구하는 곳이 아닙니다.
원극 사업이 잘 된 곳일수록 단결이 좋고, 덕이 높고 위신이 높습니다.
우리는 원극교사로서 높은 표준으로 요구해야 합니다.
양(量)이 없으면 넓은 흉금이 없고, 넓은 흉금이 없으면 곧 정확한 방법이 있을 수도 없고 화(和)할 수도 없습니다.
남만 나쁘다 하고 자기만 좋다고 하면 화(和) 할 수 없습니다.
혼돈초개법은 “자성호애(自省互愛)” 하는 것입니다.
즉, 남의 좋은 것은 말하고 자기의 경우에는 나쁜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남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원극(元極)의 덕입니다.
홍몽제판법은 자존호애(自尊互愛)하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사회에 일정한 공헌이 있게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실제 어려운 것이라면 일정한 공헌이 있는 후에 만족을 느끼면서 뽐내는 것입니다.
본래 눈은 눈썹아래에 박혀 있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눈썹 뒤에 놓여 있자니 안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점차적으로 조직과 사회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적으로 스스로 존중해야 합니다.
스스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더러 존중하라고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중해야 남들도 자기를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2부 공법은 자존호애(自尊互愛)로서 일정한 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연공은 그저 그 중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제1부 공법은 천지의 기원, 천지의 생장, 사람의 생장에 대해 말하였고 제2부 공법은 일월의 형성에 대해 말하게 됩니다.
해와 달이 그토록 밝은 것은 그가 사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심이 있다면 에너지가 그렇게 클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만물이 일월에 의지하여 생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안다면 성공단계에 더욱더 허심하고 겸손해야 하며, 스스로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공 하여 조금 공력이 생겨서 남에게 병을 치료해 준 다음에 뽐내면서 저만 잘난체해서는 안되며, 스스로 대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강단에 오르면 선생이고 강단 아래에 있으면 학생입니다.
공이 높이 올라갈수록 마음을 비우고 겸손해야 합니다.
제3부 공법은 인천교회법인데 자지호애(自知互愛)할 것을 요구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모르고 어떻게 진보할 수 있습니까? 심(心), 덕(德), 공(功), 양(量)은 사람이 어떻게 스스로 수양하고 보양할 것인가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면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았습니다.
당연히 일, 월의 덕으로 행사해야 합니다.
내가 내 쉰 숨을 상대가 들이 쉬고, 상대가 내쉰 숨을 내가 들이 쉬며, 우리는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그렇거니와 동물도 이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서로 친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다른 공법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까?
다른 공법도 좋은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높이 세우지 말고, 남을 낮추지 말며, 남의 흉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공법도 환영해야 합니다.
사회는 공정하며 역사도 공정하고 사람도 공정합니다.
기타 공법이 어떠하며,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자기의 도량(道量)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방해하건 우리는 그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마치 어른이 아이들과 같이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대해는 왜 넓고 깊은가요?
우리는 어른이 아이를 용납하듯 기타 공법을 용납해야 합니다.
덕을 기르고, 덕을 쌓음에 있어서 응당 높은 층차로부터 출발하여 음덕을 길러야 합니다.
음덕은 남몰래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음덕이야말로 진정한 덕입니다.
조그마한 일을 하고는 자기를 선양하거나 보답할 것을 바라지 마십시오.
음덕은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답할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음으로는 도과(道果)를 말하기로 하겠습니다.
도로(道路)를 선택하고 도법(道法)을 운행한 후 덕으로써 배양해야만 도과(道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만약 덕을 기르지 않으면 공력은 올라갈 수 없습니다.
옛날 신화중의 제공(濟公)이 바로 이러합니다.
책의 기록에 의하면 제공(濟公)은 어렸을 때부터 묘(墓)에서 수련하면서 인생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가 욕심이 적고, 마음이 단순한데다가 열심히 수련하여 아주 높은 경계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도법(道法)에 따라 수련할 뿐만 아니라 도법(道法)을 운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도과(道果)가 없기에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더러 묘(墓)를 떠나 대처에 나가 수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디에고 불평이 있으면 어디든지 제공(濟公)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을 쌓았습니다.
나중에 제공(濟公)은 성공하였습니다.
원극(元極)은 사회를 달리하지 않고 사회 중에서 자기를 바로잡고 수식할 것을 요구합니다.
만약 사회 중에서 자기를 바로잡지 못하고 심산유곡 속에 들어간다면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고 도리(道理)를 모른다면 사회를 떠난다 해도 여전히 정두(淨&#22836;: 깨끗한 두상)가 되지 못합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못해서야 어찌 정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깨끗해야 정두고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자는 정두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스님이 되어 고요히 살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불당의 물고 뜯는 현상은 사회에서보다 더합니다.
호남성 학생간의 싸움은 비교적 심합니다. 난장판입니다.
이 점에서 원극(元極)에서는 마음을 중심으로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만약 덕이 없으면 서로 빼앗고 죽입니다.
원극(元極)에서는 친(親)과 정(情)에 대해 분석하였습니다.
무엇이 친(親)이고 무엇이 정(情)인가?
모두들 누구든 나의 자식이요, 나의 부모, 형제요 하면서 혈통관계로부터 친(親)과 정(情)을 논합니다.
원극(元極)에서는 혈통관계의 기초상에서 공동으로 바른길로 걷는 것이라야 만이 친(親)하다고 하며 본성이라야 만이 친(親)하다고 합니다.
그래 아들은 좋은 집에서 살고 아비는 밥 빌어먹게 해도 친(親)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비가 아들에게 돈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아들이 아비한테 돈 달라고 하니 아비가 주지 않는다 하여 아들이 아비 코를 잘라냈다면, 그래 이것도 친(親)하는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본성으로부터 가난한 사람에게 돈 10,000원을 주면 그는 감사하여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몸을 닦을 줄 모르고 자신이 어떠함도 모른다면 어떻게 행동 할 수 있습니까?
바지를 모자 위에 입고 모자를 바지 아래에 쓰는 사람이 행동은 무슨 행동입니까?
우리는 도과(道果)로써 공력을 검증하고 접수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또는 만물 간에 본성으로써 화(和)하는 것은 원극(元極)의 근본입니다.
이래야만 마음과 몸이 건강하고, 지혜(智慧)가 상승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함께 맛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공력방면으로 전진하게 됩니다.
도과(道果)는 화기(和氣)를 요구합니다.
아래에서 이 점을 응용하여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며, 심(心), 덕(德), 공(功), 량(量)이 한 몸으로 되고, 사람과 천지가 한 몸으로 되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곧 몸과 마음이 통일 됩니다.
결(訣), 즉 십자진언(十字眞言)과 마음이 상응(相應)하며 그 결과 천지가 상동(相同)하며 마음과 몸이 상합(相合)하고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이 상합(相合)합니다.
내가 결(訣)을 전수하면 스스로 마음으로써 그리십시오, 의념으로써 그리시기 바랍니다.
십자진언(十字眞言)을 묵념하면서 마음에 그리십시오, 마음을 종이로 하고 의(意)를 펜으로 하고 십자진결(十字眞訣)을 법륜(法輪)으로 하여 마음과 몸을 서로 합하고 사람과 하늘을 서로 상응(相應)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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